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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큐티본문설명(마 9:9-17)2021-11-22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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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긍휼로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단지 옛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 부대에 담는 새 포도주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역시 죄인이었음을 기억하며 이러한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부르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지난 본문에서 죄인을 용서하는 권세가 있으심을 보여주셨던 주님께서는 이제 오늘 본문에서 당시 죄인으로 여겨졌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놀랍게도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아있던 중 나를 따르라 는 주님의 말씀에 즉시 일어나 따릅니다. 물론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따른 것도 아니며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10절에서 주님께서 죄인인 마태의 집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을 통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즉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뒤를 따라 나선 세리 마태는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를 자신의 집에서 제공하였고 주님은 기꺼이 함께 자리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죄인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민족의 배반자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당시 사람들은 세리와 이방인을 비롯한 죄인으로 여겨졌던 사람들과 한 식탁에 앉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죄가 전염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랍비 등으로 여기며 따랐던 사람들과 특히 예수님을 눈 여겨 보던 바리새인과 세례요한의 제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들의 기대나 소망 등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11)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의사와 병든 자에 대한 비유와 말씀으로 깨우쳐 주십니다. 의사가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그들이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적하십니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호세아 6:6; 미가 6:6-8).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질문합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합니까?”(14). 여기에서 세레요한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언급하는 금식은 참된 회개에서 비롯된 금식이 아닌, 당시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행하는 형식적 금식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됩니다(18:12).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도 혼인집 신랑의 비유를 통해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하는 금식이 아닌 참된 의미에서의 금식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즉 혼인집에서 금식하는 것은 사실상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혼인집 신랑을 빼앗길 때에는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달리 말하면, 일주일에 두 번씩 형식적으로 하는 그러한 금식이 아닌, 진정으로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려주십니다. 나아가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첫 가르침인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과 함께 하는 이 순간에 그분을 참되게 믿고 따르는 자들은 기쁨의 잔치이며, 그러나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 날이 될 때에는 제자들이 슬퍼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당연히 생각해 왔던 것들, 자신들이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들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모습이 서로 대립되는 상황에서 주님의 모습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시는 모습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기대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신의 가르침과 행하심을 낡은 옷과 새로운 천,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로주의 비유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즉 바리새인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가진 그러한 생각과 가치관 등은 낡은 옷이며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은 구약의 율법을 오해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구약의 율법의 참된 의미와 그것을 올바르고 참되게 가르치시며 행하시는 주님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주님의 올바르고 참된 가르침과 행하심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은 그들이 새롭게 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다시 태어나야 하며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그러한 생각과 가치관을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는 올바르고 참된 가르침과 가치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긍휼로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신 주님과 그분의 가르침과 행하심은 믿음으로 새롭게 된 자들에게만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새롭고 참되고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죄인이었음을 기억하며 이러한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부르셔서 새롭게 하시며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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