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의 불신앙적인 말들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를 따라 가고자 합니다. 세상적인 소망이나 이유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하나님인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시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이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며 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모압에서 되돌아오는 길 위에서 있었던 대화를 통해 되돌아오는
나오미의 발걸음이 믿음과 소망이 아닌 불신앙과 죽음을 향한 인간적인 발걸음에 불과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불신앙과 죽음의 향한 인간적인 발걸음에 불과한 것임을 그 두 번째
단계에서 계속해서 드러냅니다. 어제 본문의 대화를 통해 며느리 오르바를 모압으로 되돌아갔지만,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붙쫓아 갑니다(14). “붙쫓다”라는 말은 “달라붙다. 바싹 뒤따르다, 굳게 결합하다”라는 의미로, 룻이 나오미의 말과 오르바가 되돌아간 것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확고하게 나오미를 따라갔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룻의 굳은 결심과 행동은 이어지는 나오미와의 대화에서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먼저 나오미는 오르바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니 너도 따라 돌아가라”(15)고 말합니다. 즉 오르바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압의 백성과 모압의 신들”에게 속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룻은 어떠합니까? 룻은 답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17). 이렇게 룻은 자신의 정체성이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러한 룻의 모습은 인간적인 소망이나 유익과 목적 때문이 아닙니다. 앞서 나오미의 말에서 드러났듯, 베들레헴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고
세상적인 유익이나 삶의 평안은 전혀 기대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룻의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으며 믿음의 고백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오미입니다. 룻의 그러한 결심과 행동을 보았지만, 나오미는 침묵으로 받응합니다: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18). 본문은 의도적으로 곧장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을 때로 건너뛰어(19) 나오미의 이러한 침묵은 모압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긴 여행길에 계속해서 이어진 것으로 보여줍니다. 즉 나오미는 룻의 그러한 믿음의 결심과 고백에 “침묵”할 뿐이며, 이러한 나오미의 침묵은 빵의 집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10년만에 돌아온 나오미를 알아보며 “나오미”가 아니냐라고 말합니다(19). 그러나 나오미의 첫 반응은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20)는 것입니다. “즐거움”이란 의미의 “나오미”가 아니라 “쓰다”라는 의미의 “마라”로 나오미는 자신의 지난 삶을
규정합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이러한 쓰디쓴 삶의 이유를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기 떄문”이라고 토로합니다. 여기에서 “괴롭다”로 번역된 단어는 동사 “마라르”입니다. 나아가 나오미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였다”(21)고 말합니다. 흉년과 남편의 죽음, 아들들의 죽음이라는 지난 10여년간 나오미의 삶은 쓰디쓴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이었고, 그 삶의 풍족함이 서서히 비워져
사라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번역에 “징벌하였다”는 의미는 “주목하다, 주시하다”는 의미이고 “괴롭게 하다”는 의미는 상하게 하다 쓸모없게 하다는 의미와 함께 “악하게 다루다, 손해를 주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오미는 자신과 가족이 베들레헴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 전능자가 자신들을
계속해서 주시하여 악하게 대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8절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선대하지 않았다(은혜로 대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드러내는 나오미의 말에서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나오미는 룻의 믿음의 결심과 행동에 “침묵”하였던 그 여행길의 끝에, 삶의 쓰디쓴 괴로움과 고통을 토로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비난하며
더 이상 자신의 삶에 즐거움(나오미)가 없고 오직 괴로움(마라)만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룻과 나오미의 모습은 서로 역전된 모습입니다. 이방여인 모압여인인 룻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드러내지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여인 나오미는 그 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오미와 룻은 동일한 처지입니다. 아니, 룻이 더욱더 불행한 처지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들이 죽었지만, 자신도 이제 얼마후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백성, 자기 하나님, 자기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반면 룻은 남편이 죽었고 자녀도 없습니다. 이방여인, 그것도 이스라엘 땅에서 따돌림받던 모압여인입니다. 룻에게는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어머니 나오미 밖에 없습니다. 나오미마저 죽고 나면, 룻은 혈혈단신 홀로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긴 인생의 시간을 보내어야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한 상황에서 나오미는 불신앙을 보이며, 룻은 믿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떠합니까?
#룻기_1장 15-22절, #만나교회,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비스바덴, #한인교회, #개혁교회, #Frankfurt, #Korean_Church,
#koreanische_kirchengemeinde, #MannaChur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