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뒤를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 각자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뒤를 따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삶은 희생과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우선시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시다.
어제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시는
분으로 말씀으로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특별히 가버나움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신 이러한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과 능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쌌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이라면, 많은 교회와 사람들은 이것을 기회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고치시고, 나아가 놀라운 일들을 행할 기회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자기 주위에 몰려들어 에워싸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십니다(18). 왜냐하면 그렇게 몰려들어 에워싼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수훈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하기보다는 무언가 자신이 원하고 바라고 목적하는 어떤 것을 충족하고 만족하고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무리들을 떠나십니다. 이것을 본문은 한 서기관과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떠나 건너편으로 가려는 것을 본 한 서기관이
나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19)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서기관의 말에는 예수님이 가시는 목적지와 장소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가시는 장소와 목적지를 말씀해 주시면 따라 가겠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셔서, 예수님의 발걸음은 목적지나 장소가 없음을 알려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저 발길가는
데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뿐입니다. 앞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했을 때에도 예수님과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장소와 목적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즉 핵심은 “어디”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입니다. 달리 말하면,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삶에는 단지 주님을 따르는 것, 즉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하지, 어디에서, 어떤 직위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심지어 어떤 능력으로, 얼마만큼의 영향력으로 등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나아와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라고 요청합니다. 본문은 이 사람이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밝혀서 이 사람이 단순히 많은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뒤를 따라 나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삶의 상황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을 고민하게 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의 아버지는
방금 사망한 듯 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상 24시간 안에 무덤에 묻는 것을 생각하면, 이 사람은 지금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듯 합니다. 나아가 이 사람은 아버지의 사망이후, 집안의 이런 저런 일들(상속문제)을 정리해야 할 의무와 필요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22). 즉 주님께서는 이 제자의 요청의 핵심을 끄집어 내십니다. 이 제자는 단지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례후의 상속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관점에서 세상의 재물에 대한 그러한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우선적
순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6: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이 제자에게 “세상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즉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따르라 고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물론 오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이러한 외적인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삶은 희생과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삶 속에 이 서기관과 한 제자가 보여주는 그러한 모습들은 없는지
돌아보면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주님과 같은 길을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길이 아닌,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르는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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