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9일 토요일 큐티 본문설명 본문: 마가복음
10:17-2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 어렵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부자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이어진 본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 본문이 누가 큰자인가 라고 다투는 제자들과 작은 자가 되어라 라는 에수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무엇을 의도하는가 라는 점입니다. 흔히 이 본문을 대하면 던지는 질문이 “나도 재물을 다 버려야 하는가?”입니다. 본문의 일차적인 관심은 그런 질문이 아닙니다. 본문의 일차적인 관심은
“재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마태에 따르면 청년)은 제자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길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젊고 지위가 있고 부자이기에 소위 “큰 사람” “높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 사람은 종교생활의 진지함과 열심도 대단하여 가히 종교생활에서도 “큰 사람” “높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지 질문”합니다. 또한 그는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생각하면, 그는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도 우뚝 선 사람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는 말 “명품신앙” “큰 믿음” “믿음도 좋고 실력도 좋고” 등등의 온갖 미사여구가 아깝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특정 개인을 사랑한다고 표현된 유일한 경우입니다. 이 지점에서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모든 면에서 다 좋으나 한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심지어 제자들을 부를 때에도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나를 따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유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시에 있던 일반적인 통념
때문인 듯 합니다. 즉 여러 정결법들을 잘 지키고 또한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을 베푸는 것이 영생을 얻는데
더 유리하고 가깝다고 여긴 사회적 종교적 통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일수록 더 정결법을 지키고
더 많이 구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정결법을 지키기는
거의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고 구제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생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즉 영생을 얻는 정결법을 잘 지키고 구제도 많이 하는 부자조차도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면, 다른 보통의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구원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겠습니까?
조심스럽지만, 이런 통념에 따라 제자들은 “누가
크냐” 혹은 “누가 더 높은 사람인가”라는 말다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소위 크고 높은
자,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영생을 얻는 자리에 더 가까이 있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제자들은 그토록 높은 자 큰 자의 자리에 집착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반전입니다. 당시의 통념상 영생에 가까운 자리에 갈 수 있는 조건들을
버리고 오히려 영생에서 먼 자리로 가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의 통념을 뒤집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를 따르라”는 요청도 이때쯤에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한 자리에 앉는 것이며 배고파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돌아가고 제자들은 심히 놀랍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은 사람의 능력이나 사람이
행하는 어떤 것으로 얻고 획득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사람의 의지나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즉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체하거나 대신할 수 없습니다. 최근 믿는 자가 심각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더욱 “굳세게 붙잡은 결과”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인생을 누리는 소위
“신앙의 반전”을 말하는 경우를 종종 접합니다. 혹은 소위 “명품신앙, 명품교회”등등을 운운하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반전은 그 반대입니다.” 성공한 삶,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그 성공한 삶과 높은 자리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서는 반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말씀하시는 믿음의 반전입니다. 즉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이나 우리가 행하는 그 무엇으로도 영생의 자리에 가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믿는 자로써 믿음도 좋고 사회적 지위나 부나 명예도 높다는 것이 영생의 자리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 반대로 믿음도 좋고 가난한 이들도 많이 돕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것이 영생의
자리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믿음의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며 우리를 참된 믿음의 삶으로 부르시며 인도하시며 그 믿음의 삶을 가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영생과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는 사도들의 선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이
초청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려고 길을 나서는 사람에게는 영생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오늘 이 영생의 길을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마가복음 #큐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장로교회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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