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은 지혜있게 대답한 한 서기관을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않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서기관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잘 알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지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두개인들과의 일련의 논쟁들을 옆에서 지켜본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 내용입니다.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마가복음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마태복음22:34-40과 누가복음10:25-29에
따르면, 이 서기관(율법학자/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수많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명예를 가진 사람 혹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인 듯 합니다. 특히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 중의 한명(마22:34)인데,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를 적대시하고 반대하던 사람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두개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성경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통렬한 비판과 지적에 대해 아주 환영하는 입장이었던 것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 자신들이 결코 논박하지 못하던 사두개인들의 교묘한 주장을 예수님이 논박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에
따르면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잘 대답하신 것”으로 여깁니다. 달리 말하면, 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유익에 도움이 되었기에
예수님이 “잘 대답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입장에서 이 서기관(바리새인, 율법학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입장이나 주장을 예수님께서
더 많이 지지하고 뒷받침해 줄 것으로 착각하면서(마태와 누가는 시험하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제 서기관은 “선생님이여
옳소이다”고 맞장구를 칩니다. 우리 번역은 헬라어의 의미를
잘 살지지 못했습니다. 의미를 살리면, “가정교사여, 좋구나”입니다. 즉 이
사람은 예수님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생님”(랍비)가 아니라, 가정교사를 주로 가리키던 “디다스칼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맞다, 옳다”라는 의미대신, “좋은” “잘” 라는
의미의 칼로스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들은 이전에 마가복은 7장28절에 나온 한 헬라인 여인이 자신을 개로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라고 말하던 것과 대조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당시에 랍비를 칭하던 용어중의 하나인 “주여”라고 부르고, “나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인정”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이 서기관(율법학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조금 낮은 정도의 교사로 알아주는 권위자로 스스로를 내세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지식을 덧붙여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앞부분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조금 바꿉니다. 즉 그는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참이라고
인정합니다만, 그 밖의 것은 자신의 주장으로 슬쩍 바꿉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보다 못한 가정교사수준인 예수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첫째로 고치는 부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방법으로 예수님은 마음(칼디아), 목숨(프쉬케), 뜻(디아노이아), 힘(이스퀴스)을 언급하지만, 이 사람은 마음(칼디아), 지혜(수네시스), 힘(이스퀴스)을 말합니다. 즉 목숨과 뜻을 “지혜”로 바꿉니다. 여기에서 지혜로 번역된 수네시스는 “지식과 결합된 이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목숨과 뜻”을 말씀하셔서 누구나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이 사람은 “지식과 결합된 이해”를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고치는 부분은 이웃을 자기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모습/방법으로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제물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번역에 “나으니이다”로 번역된 단어는 플레이온이란 단어인데, 우리 번역처럼 “낫다”는
의미도 가지지만 “많다”는 의미가 더욱 일반적입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제물전체를 번제로 드리는 제사”와 “희생제사” “모두(전부)”를 덧붙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제물의 양보다 이웃을 돕는 양이 더 많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높은 지위와 부자들이 가졌던 구원관에 따라 행한 많은 구제를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여기에서
“지혜있게”는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 사람은 바리새인과 율법사로서의 최종적 권위를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앞서 예수님이 이런 저런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잘 하는 것”을 보고 주의깊게 자신의
말을 선택하고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잘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이런 태도를 아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고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평가는 사실상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을 많이 지키고 구제를 많이 하면 할수록 천국문에 가까이 서 있어서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라는 당시의 구원관을 반영합니다. 즉 예수님은 이
율법사가 은근슬쩍 집어놓은 그들의 구원관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이 평가는 결국 그런 구원관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지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3:3,5).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요3:15,16). 당신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마가복음 #큐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장로교회 #고신
#Frankfurt #Germany #Manna #Ma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