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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2월 13일 월요일 큐티본문설명(누가복음 9:57-62)2023-02-1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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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누가복음 9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cf. 8:19-22). 9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심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그리스도(메시야)십니다라는 제자들의 고백을 받으신 주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그리스도(메시야)로 행하실 일이 세상적인 왕으로써의 불을 명하여 멸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받고 버림받고 죽임당하고 부활하시는 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의 관심은 주님이 말씀하신 고난받고 버림받는 메시야가 아니라, 세상적인 왕과 권력자로서의 모습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어리석은 모습들을 드러냅니다.

 

첫번째 모습은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실상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나서고자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한 가지 착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 53절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더니"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승천하기 위하여“(51). 이미 9장의 문맥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22, 31, 41, 44, 51). 그러나 주님께 나아와 따르겠다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이 사람이 말하는 어디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주님은 드러내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여우나 공중의 새도 이 땅에 집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선언하시는데, 이것은 이 사람이 말하는 어디로가 이 세상에서의 주님의 집을 의미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처음 보내실 때에, 제자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며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삶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모습은 주님께서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고 부르신 사람들 중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59). 또 다른 한 사람은 먼저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61). 이러한 요청들은 당시 유대 사회속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의 계명을 순종하는 모습이며 따라서 유대 사회 속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적 규정에서 제외된 경우들이 있었는데,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민수기66-7)과 제사장의 경우(레위기 21:10-11)입니다. 이 두 경우는 부모나 형제자매가 죽었을 경우에도 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도록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헌신/드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이 사람들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60)고 말하시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은 구약의 나실인이나 대제사장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나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언급한 사람의 경우에는 만약 그 아버지가 이미 죽어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사람은 율법에 따라 사람들 앞에 나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요청은 아직 아버지가 죽지 않은 상황에서 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례를 치른 뒤에야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것은 언제 예수님을 따를 지 알지 못하고 무작정 미루기만 하는 상황이 됩니다. 다음으로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 사람의 경우에는 사실상 단순한 작별인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유산과 처리해야 할 일들을 처리할 기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에게 있어 우선적인 중요성은 여전히 세상적인 것에 놓여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은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나게 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삼고 매일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로만 따르겠다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다른 것을 우선 순위로 삼는 것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삶이 참되게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삶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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