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어제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천국백성들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지는 것 등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하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천국백성들이 세상사람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비판(판단)하지 않고 정죄(저주)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과 헤아리지 않고(계산하지 않고) 후히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간혹 오해하듯 „무조건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천국백성들도 삶의 여러
가지 상황과 형편 속에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비판과
정죄와 헤아리는 모습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즉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린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도 나를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린다고 하더라도, 나 또한 그러한 비판과 정죄와 헤아림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러한 비판과 정죄와 헤아림이 „용서“를 염두에
둔 것이어야 함을 지적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볼 수 있다면, 당연히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볼 때에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것보다 바로 내 눈 속에 있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고 확실히 압니다. 그러나 바로 내 눈 속에
있는 더욱 분명한 것은 모른척 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것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외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가진 선입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보고 파악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선입관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린다면, 우리는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진 선입관에 불과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가진 선입관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헤아리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나와 다른 사람 모두가 „소경“임을 드러냅니다. 주님이 말씀하듯,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면,
잘못된 길로 갈 뿐입니다. 또한 제자는 선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제자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살아갈 때, 언젠가 „온전하게 되어“(완전히 수리되어, 회복되어) 선생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백성이 따르며 가르침을 받아야 할 선생은 누구입니까?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천국백성의 삶은 남을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으며 남에게 후히 주며 계산하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삶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따라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입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지내며 주님의 뒤를 따르며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온전하게 되어“(온전하게 수리되어, 회복되어) 우리의 선입관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따라 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다른 사람들을 천국백성의 삶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러한 천국백성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시다. #누가복음_6장 37-42절, #큐티,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비스바덴, #한인교회, #만나교회, #Luke_6: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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