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불명예를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
즉 예수의 증인되기에 가치있는 자로 여겨짐을 기뻐합니다. 이런 즐거움은 제자들이 어디에
있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의 증인된 삶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대제사장들과 그 무리들, 산헤드린
공회원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공회의 재판장에 선 사도들로부터 그들의 죄를 지적받고 생명의 말씀을
“듣고”(5:21-32) 오히려 크게 화를 냅니다. 우리 번역에 “크게 노하였다”는
말은 “디아프리오”란 단어인데, “조각조각 톱질하다” “마음을 찌르다”는 의미로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이들의 반응을 표현하는 7장54절에는 “마음에
찔려”라고 번역을 합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자신하며 행했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대한 자부심이 산산이 부서지고 조각났습니다. 또한 이 표현은 2장37절에서 사도들의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카타닛소)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회개의 자세를 가졌던 이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자부심이 파괴된 것 자체에 대한 분노를 가리키며 이것은 곧장 분노의 표출로 이어집니다: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7장에서 스데반을 향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을 들어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어떤 이들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가지만, 또 어떤 이들은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히10:39). 이런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일어나 그냥 두자고 말합니다. 이런 가말리엘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크게 두 개의 대립하는 파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사두개인파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파입니다. 사두개인파는
당시 대제사장들을 지지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파는 당시 대제사장들을 반대하며
공회에서 소수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말리엘이란 율법교사는 바리새인파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던 사람입니다(사도 바울의 선생 행22:3). 이런 가말리엘이 보여주는 행동은 사실상
애매모호한 행동이며 심지어 제자들의 증언을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예를 두 가지 제시하는데
둘 모두 부정적인 예입니다. 즉 드다와 갈리리의 유다 모두 스스로를 선전하고 백성을 꾀어 따르다가 죽임을
당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따르는 이 사람들도 그와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놓아두라고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며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의 이 말은 앞서 사도들이 산헤드린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말한
예수님을 그들이 십자가에 죽게 하였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그들의 행동이 불의한 것이었음을 증명하셨고 우리가 증인이다 라는 주장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며, 심지어 앞서 제시한 두 가지 예처럼, 그들(사도들)의 주장은 자신들을 선전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가말리엘은
앞서 두 가지 예와 함께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대립시켜 내세워서, 사도들의 주장을 헛것으로 되돌립니다.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이 이러한 애매모한 충고를 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하던 백성들이 사도들에게도 지지를 보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말리엘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치적 입지가 좁았던 바리새인파로써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려는 의도까지 가지고 있습니다(그의 말의 어투가 변회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38). 이것은 이후 7장에서 스데반에 대한 대제사장의 심문 이후 성문 밖에서 돌을 던지는 일에 가말리엘의 제자인 사울이 그 주체자로
나타나 거짓증인들이 사울의 발 앞에 옷을 벗어두는 것을 통해서 확인이 됩니다. 당시의 랍비와 그의 제자(도제)와의 관계를 볼 때, 사울의
이런 행위는 스승인 가말리엘의 지시와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이것은 본문에서
사도들이 가말리엘의 개입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사도들은 가말리엘의 그런 말들까지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로 여깁니다. 여기에서 “능욕받는 일”은
경멸을 받다 명예가 손상되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단지 채찍질에 대한 말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이 경멸받았고 사도들의 말이 거짓말로 여겨졌고 그래서 사도들은 사기꾼과 같이 여김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불명예를 당하는 일, 명예를 손상받은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합니다. 여기에서 “그런 불명예에 합당한 자(불명예를 받아 마땅한 자들)로 여기는 것”은 사도들이 아닌 산헤드린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즉 그들(사도들)은 스스로를
선전하는 거짓말쟁이로 그들(사도들)의 증언은 전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그런 불명예를 받아 마땅하다고 산헤드린에 모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바로 그것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증언은 자신들이 목격한 예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풀려난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욕받는 자가 되었음을 기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파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며 그로 인해 받는 불명예를
오히려 기뻐하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사도행전5장, #큐티, #초대교회, #사도들의_증언, #가말리엘, #만나교회,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장로교,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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