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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3월 13일 수요일 큐티본문설명(창세기 16장7-12절)2024-03-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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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어제 본문에서 사래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의 관습과 방법으로 성취하고자 시도한 여종 하갈의 임신이 어떻게 그 가정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피하여 도망한 여종 하갈에게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미 1절에서 밝힌 것처럼 여종 하갈은 이집트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도망할 장소를 이집트로 정하고 그리로 내려가는 술 광야를 지나며 샘물 곁에 잠시 머무릅니다. (아마도 하갈은 12-13장에서 아브람과 사래가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파라오가 사래에게 준 노예인 듯 한데, 이것은 그녀의 몸에 노예임을 드러내는 표시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임신한 상태로 광야길을 걷던 중 만난 그 샘물 곁에서 쉬고 있는 하갈을 하나님의 사자가 만나러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질문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

 

하나님의 사자의 이 질문은 조금 뜻밖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사래의 여종 하갈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만난 그 장소는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목인 술광야 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의 이 질문은 가나안이나 이집트와 같은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질문을 받은 사래의 여종 하갈도 분명히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갈은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8)라고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자의 질문인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은 하갈의 정체성과 하갈이 속한 곳에 대한 질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너는 어디에 속한 자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가 속한 사래를 떠나 어디로 가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며, 하갈은 내가 속한 사래에게서 도망하는 중이지만, 누구에게 속할지는 알지 못한다고 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갈의 몸에는 노예의 표시가 있었을 것이기에, 그녀가 어디로 가든 노예로서 누군가에게 속해야 함을 드러냅니다.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집트에서 파라오에게 속한 수많은 노예들 중의 하나였던 하갈은 사라에게 주어졌고,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이집트로 내려가는 하갈은 그곳에서 또다시 파라오나 혹은 다른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갈 것이거나, 아니면 도망친 노예로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은 더 큰 문제를 포함하는데, 하갈이 임신한 아브람의 아이도 출생하면 자연히 노예로 낙인이 찍힌다는 문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하갈에게 보내셔서 바로 그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어디로 가든 노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인 하갈이며 그 자녀들 또한 마찬가지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나아가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가 사래의 손 아래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라“(9)고 명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하갈의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이의 삶을 노예의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바꾸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아이가 또한 아브람의 씨이기 때문입니다(21:13). 그렇기에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고 약속하며, 그 아이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어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삶, 약탈자의 삶을 살 것임을 말하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비참함)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들으신 하갈의 고통(비참함)은 단순히 여주인 사래의 학대가 아니라,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비참함입니다.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하갈의 마음의 고통을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아브람의 아이를 임신함으로 그러한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난 듯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였지만, 여전히 하갈은 여주인에게 속해 있는 노예입니다.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였지만, 여전히 그녀는 노예로 누군가에게 속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여주인 사래에게 되돌아가 그 손 아래에 스스로 순종할 때,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브람의 아들자 자신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통해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것입니다(cf. 21:12-21).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고통을 들으시며 세상을 번성하도록 돌보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며, 우리 또한 세상의 고통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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