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가로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매년 반복되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부활주일까지
마가복음 14-16장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앞둔 이틀 전이라는 언급에서 시작합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설렘과
기쁨으로 유월절을 준비하기에 분주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참으로 구원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월절 기간에는 이스라엘 땅에 있는 사람들, 노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방인들조차도 안식과 평화를 누리며 기쁨을 나눕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바로 그러한 유월절을 준비하는 기간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고(1,2),
가룟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봅니다(11).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가치관과 생각과 소망 속에서 예수를 넘겨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과 소망을 결코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가치관과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결코 따르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3년의 세월을 살았던 제자들은 어떠합니까? 본문에서
드러나는 제자들은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라고 말하며 옥합을 깨뜨린 여자에게 화를 내며 책망합니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듯 하지만, 정작 그들의 관심은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가치의 돈입니다. 만약 그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이 아닌 두 렙돈의 가치(막12:42)에 불과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결국 비록
제자들이 3년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그 가르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세상적 가치”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들은 이 중차대한 시기에 “왜 그렇게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당시에 부자들은 성전에 올라가기 전에 미리 동전을 많이 준비하고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그 동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렸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를 칭송하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정말 멋진 그림이 될
것도 같습니다. 성전을 향해 예수님께서 올라가시고 그 앞뒤좌우에 제자들이 서서 동전을 던지면서 호산나 참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칩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따라서 외칩니다: 호산나 참된 다윗의 자손이여! 저 높은 자리에 앉았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내려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전하고, 로마 군병들은 혼비백산 다 도망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는 멋진 장면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장면일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세상적인 가치관과 방법이 보여주는 그런 그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죽음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장례를 이야기합니다. 죽은 시체의
냄새를 가리는 일환으로 향료를 발랐던 당시의 관습을 언급하면서 이 여자가 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 누구를 향해서도 하지 않았던 칭찬의 말씀을 합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3년씩이나 때로는 비바람을 맞으며 때로는 굶주리며 때로는 생명의 위협도 받으며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저 여인이
온 천하에서 기억된라?” 억울한 심정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방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준비한 것은 오직 이 여인뿐이었기에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을 칭찬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행하는 어떤 행동이나 말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하게 되는 더욱 더 근본적인 삶의 가치관과 방식이 우리가 행하는 행동과 말의 참된 내용과 의미를 규정합니다. 오늘 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며,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앞두고 나와 가족의 현재적 삶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참으로 우리의 삶의 가치관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것인지 살펴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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