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 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의 개입과 책망을 통해 무사히 이집트에서 올라온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으로 되돌아가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불신앙적이고
어리석은 모습에서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아브람 앞에 새로운 현실적인 문제가 닥쳐오며, 이를 통해 아브람이 앞서 보여준 믿음의 회복이 참인지
거짓인지 테스트를 받으며, 나아가 아브람이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도 계속해서 그러한 믿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먼저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의 시발점은 „그들의 많은 소유물“입니다(5-6). 아마도 아브람과 롯이 하란에서 그들의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왔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그들은 어느 정도 넉넉한 소규모의 부족이었을 것입니다(12:5).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그들의 소유가 많아지게 된 것은 사실상 이집트에서의 어리석은 불신앙적 태도 때문입니다(12:16, 20; 13:2). 즉 불신앙으로 인해 얻은 소유물은 결국 아브람의 가족에게 다툼과 시험거리가 됩니다. 즉 많은
재물(양과 소)로 인해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그러한 많은 소유물의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동거하기에 그 땅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다“(6)고 언급합니다. 본문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 땅이 그들이 함께 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나싸)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함께
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6)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을 살펴보면,
6절의 후반부인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함께 거할 수 없었다“는 표현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6절의 상반부인
„그 땅에 그들이 함께 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며
강조합니다. 특히 본문은 „그 땅“을 강조하는데, 창세기 12장에서 „땅은 12장 1절, 6절, 7절, 10절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땅을 가리키고, 13장에서는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을 쳤던 곳,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3-4)이라고
정확히 그곳을 가리킵니다. 이곳은 „가나안 땅“(12:5)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벧엘과 아이 사이“(12:7-8; 13:3)입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아브람과 롯이 함께 동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표면적인 목자들의 다툼의 문제는 아브람이 롯에게 거주할 지역을 먼저 선택하도록 제안하여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단지 재산의 문제나 거주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는 아브람의 말에서 드러나듯, 아브람과
롯이 „함께 거주하지 않는 것“, 11절의 표현을 따르면,
„서로 떠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은
아브람이 제안한 것처럼, „거주할 땅“의 문제로 관심을 이끌어가면서 „거주할 땅을 선택하는 기준“을 드러냅니다.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마치 여호와의 동산같고 이집트 땅과 같아서“ 요단 온 지역을 선택하고
„동으로 옮깁니다“(10). 즉 롯이 거주할 땅을 선택하는 기준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으로 그 내용은 물이 풍부한 곳으로 마치 여호와의 동산같고 이집트
땅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롯의 기준은 결국 물이 풍성하여 기근이 없고 양과 소를 키우기에 먹을 것이
풍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롯의 기준은 „믿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없으며, 심지어 이러한 물질적인 기준으로 여호와의 동산과 이집트 땅을 동일시합니다.
결국 그렇게 롯이 선택하여 살아가기 위하여 향한 곳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들이 모여 살아가는 그 지역의 도시들입니다(13).
그러나 본문은
아브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기준을 말하지 않고, 단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다“고 말합니다(12). 왜냐하면 12장 1-9에서 이미 아브람이 가진 기준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음을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렇게 가보니 그곳은 가나안 땅, 세겜과 아이 사이였습니다. 세상적인 어려움 앞에서 아브람은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갔으나, 책망을 받은 끝에
되돌아 와서(12:10-20)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13:1-4).
결국 이러한
본문의 강조와 흐름은 아브람과 롯의 문제가 단순히 소유가 많음이나 다툼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문제가 달려있음을 보여줍니다. 롯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눈과 물질적인 풍요가 기준이었습니다. 반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기준이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강조는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아브람이 회복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답을 줍니다.
본문이 보여주듯, 아브람은 롯과 달리 믿음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기로 결정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그 땅 가나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아브람의 결정은 아브람의 후손에 대한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처음 하란을 떠날 때,
그리고 이집트로 내려갈 때 아브람은 롯과 함께 동거하며 함께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과 사래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브람은 롯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긴 듯 합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람은 롯과 함께 동거하기를 포기하며 거절합니다. 비록 여전히 아브람과
사래에게 자녀는 없지만, 아브람은 롯을 후계자로 여기지 않습니다(cf. 15:1-3 롯과 서로 떠난 아브람은 자기부족원 중의 한면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여긴 듯합니다). 심지어 자녀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후계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브람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이신 반응(13:14-18)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처럼 아브람은
믿음을 회복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길을 걷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에서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삶에서도 때로 이러한 선택의 결단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믿음의 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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