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지난 토요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사라 편에서의 어떠한 상황이나 조건, 심지어 그들의 믿음이나 불신에도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신 때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상속자를 100세의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에게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상속자 이삭이 태어나 자라서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있었던 사건을 알려줍니다. 젖을 떼는 일과 관련된 당시의 관습상 이때 이삭의 나이는 3-4세 정도였습니다.
당시 영아들이 사망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젖을 떼는 이 날은 온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축하와 잔치의 자리였습니다.
상당히 큰 규모의 부족을 이끌던 아브라함이었기에 관습을 따라 „큰 잔치“를 베풀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도 초대하였을 듯 합니다. 더구나 젖을 뗀 그 아이는 보통의 아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불가능을 뛰어넘어 말씀하신 대로 주신 언약의 아이입니다.
이 언약의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 더구나 가장 생존에 위험한 젖먹이의 시간을 무사히
지남으로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다른 부분들, 즉 하늘의 별들과 같은 많은 자손들, 약속하신 땅, 땅의 모든 민족이 얻게 될 복 등에 대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첫 단추가 꿰어졌습니다.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잔칫날이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모든 즐거움과 기쁨이 한 순간 깨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자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자 사라의 아들인 이삭을 놀리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지 아이들 간의 놀람이나
다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8세 정도의 이스마엘이 이제
3-4세의 이삭을 놀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 출생 창16:16; 아브라함 100세에
이삭 출생). 이 사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서는 „핍박(박해)“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관습상 이스마엘은 이미 한 사람의 남자로서 모든 위치와 일들과 대접을
받는 나이였고, 더구나 아브라함의 아들이기에 큰 잔치에 늙은 아브라함 대신에 여러 가지 실제적인 잔치의 일들을
진행해야 하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젖을 뗀 서너 살에 불과한 이삭을 놀리고 핍박합니다.
상상을 동원해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들의 생은 얼마 남지 않았고,
아직 정식 상속자인 이삭은 젖먹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은 후 자신이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차지하리라 생각하고, 그때가 되면, 젖먹이에 불과한 이삭을 내쫓을 것이라고 겁박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바로
그러한 경험을 어릴 시절에 사라로부터 당했기 때문일 듯도 합니다.
이러한 이스마엘의
모습은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완전히 배제하고 인간적인 방법과 무력과 생각을 따라 행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수 없게 되고“(16:19),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16:12)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스마엘의
어리석은 행동을 목격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도록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21:10)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사라의
요구는 앞서 이미 살핀 것처럼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핍박한 이유와 목적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업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업은 단순한 재물과 같은 세상적인 것을 넘어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미
창세기 17장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 언약의 말씀을 지키고자 합니다.
비록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이스마엘이하나님이 말씀하신 언약의 상속자인
이삭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언약을 조롱하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파괴하고 실패하게 만들려는 어리석은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라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육신으로는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심히 고민하고 근심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근심하는
모습은 인간적으로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요구대로 행하라고
명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십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21:12).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고민과 근심도 생각하셔서,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네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3) 고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이스마엘의 불신앙적인 모습과 그에 대조하여 사라의 신앙적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라의 모습은 사실상 창세기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평가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후 창세기 23장 1절에서 백이십 칠세의 나이로
사라가 죽기까지 더 이상 사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자신에게서 태어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언약의 상속자임을 분명히 알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의 상속자인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행합니다.
이처럼 본문의
어리석은 이스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희롱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나아가 육신이 아닌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상속자가 됨을 기억하며 우리들도 육신이 아닌 믿음을 따라 주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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