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 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어제 본문에서 리브가와 야곱이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삭을
속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이삭은 의심스러워 하며 세 번에 걸쳐 자기 앞에 들어온
사람이 에서인지 확인하고자 하지만 분별하지 못하였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이 마지막으로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라고 질문하고 야곱이 „그렇다“라고 거짓으로 응답한 것에서 시작합니다(24). 이삭은 이렇게 확인하고, 자신이 요구한 대로,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축복하리라“(25)고 말합니다. 이러한 축복과 관련된 먹을 것을 주고 축복을 받는 „주고받음“의 양식은 본문을 지배하는 요소인데(4, 7, 9, 10, 14,
17, 19, 25) 이삭에게서만 볼수 있을 뿐 다른 조상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cf. 창48). 이삭의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과 본문의 문맥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삭의 „주고받음“에 대한 요구는 전형적인 세상적인
방식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이삭의 세상적인 모습은 그가 말하는 복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삭이 축복한 내용에는 이삭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찾아볼 수 있는 그 흔적은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주신 밭의 향취“(27)라는 언급입니다. 그나마도 이것은 리브가의 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20여년간 아이가 없는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 간구를 들으신 것(25:21)을
가리킨 표현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진 경험(22)이나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말씀하신 일(26:1-5) 등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이에 비교하여 야곱의 경우에는 복의 내용보다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과 그 언약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48:3-4,
15-16).
다음으로 이삭이 언급하는 복의 첫 내용은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한다“(28)는 것인데, 이것은 전형적인 이 세상에서의 부요에 대한 축복으로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 본문에서만
언급되는 내용입니다(cf. 48, 49장의 야곱의 축복).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뿐(13:14-17; 15:7; 17:1-8; 26:3),
세상에서의 부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땅의 기름짐“에 대한 언급은 파라오가 요셉에게 그 가족을 이집트로 데려오라고 말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45:18)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출애굽 이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르면,
풍성한 양식과 기름 등에 대한 언급들이 있지만(신7:13; 8:7;
33:28 등), 그 강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대한 것이며 또한 이삭 이후 수백년이 지난 세대에게 직접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언급에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삭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부요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비하여 야곱의 경우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48:4)고 언급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언급합니다.
이어서 이삭이 언급하는 복의 두 번째 내용은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한다“(29)는 내용입니다. 언뜻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세 번째 내용과 유사한듯 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2-3; 22:17-18).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달리,
이삭의 언급에는 „섬긴다“와 „굴복한다“는 말이 중심입니다. 여기에서 „섬긴다“로 번역된 말의 의미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고 „굴복한다“는 말은 „엎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즉 „노예가 되어 엎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이삭은 자기
아들들(자손들)의 사이에 이것을 적용하여, 에서(의 후손)가 주인이 되고 다른 아들(의 후손들)이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말씀에서 복과 저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그 축복과 저주는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저주하는 자와 축복하는 자에 대한 것이지만,
이삭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주인과 노예와 관련된 언급들이며, 그나마도 그 저주와 축복의 주체는 하나님으로 명시되지 않고,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라는 이삭 자신의 소망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 이삭의 말들은 전형적인 세상적인 가치관과 기준을 따른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25: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복중에 있는 두 아이의 후손에 대하여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미래에 되어질 일에 대한 예전적 선언이고,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강한
족속과 약한 족속, 큰 자와 어린 자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강한 이 족속은 큰 자이며 약한 저 족속은 어린 자입니다. 따라서 큰 자이며 강한 이 족속이
작은 자이면서 약한 이 족속을 섬긴다는 의미로 일반적인 상식인 작은 자이면서 약한 자가 큰 자이며 강한 자를 섬긴다는 개념을 역전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이삭의 선언은 인간적인 축복을 넘어서 이미 하나님이 리브가를 통해 말씀하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어리석은 축복은 이삭 자신이 에서를 사랑하여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삭의 선택은 야곱의 속임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갈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삭은 강한 자이며 큰 자가 약한 자이며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적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선언과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리브가와
야곱의 어리석은 속임조차도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선언과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며 우리의 뜻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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