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줍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살전2:3,4에서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당신은 누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합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이야기입니다. 대제사자들과 공회는 대제사장의 집에서 곧장 빌라도에게로 끌고 가서 넘겨줍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선언할 수 있는 정식 재판을 열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월절 명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 모든 과정을
재빨리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이것을
하면 폭동이 날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관심은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대제사장들의 고발과
빌라도의 심문에 예수님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죄가 있으면 있는 데로, 죄가 없으면 죄가 없는 데로, 사람들은 재판장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고 변명하기 마련이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변명이나 주장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셨습니다”(롬4:25). 갈라디아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빌라도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기이히 여기면서,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관습을 따라 사람들에게 예수와 바라바 둘 중 누구를 놓아줄 것인지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서 고발하였다”(15:10)는 것과 또한 “무슨 악한 일을 한 것이 없다”(15:14)는 것을 빌라도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그 동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소수의 높은 사람들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질문하면, 예수를 놓아달라고 할 것이라고 예상한 듯 합니다. 심지어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법정 앞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조차 다 도망한 상태에서 빌라도의 법정 앞에는 대제사장들의 사람들과 단순히 호기심에
모여든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 모두는 대제장들의 몇 마디 충동하는 말에,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즉 빌라도의 재판장 앞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홀로 서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판결은 빌라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소리친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로 확정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는 이런 대중들의 외침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며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과 대중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빌라도 역시도 올바른 판단이나 공의는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자리와 위치와 유익입니다. 그렇기에 빌라도는 한 사람의 목숨으로 대중의 만족을 채워주고자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들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라는 질문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삶의 행보와 결정에 제시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만족케 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큐티, #재판받는 예수님, #빌라도,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장로교, #고신, #Frankfurt, #Germany, #Manna, #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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