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9일 화요일 큐티본문설명(막11:20-26) 본문: 마가복음
11:20-26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내려놓으시는) 것을
믿으며, 우리 또한 내가 남에게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먼저 내려놓을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은 조금 어렵고 또 많이 오해되는 본문이기에 큐티를
넘어서 성경공부에 가깝게 길게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4월 주일예배에 이 말씀의 내용을 나누고
말씀나눔시간에 좀더 살펴볼 예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살펴본 성전청결사건을 중심으로 그 앞 단락의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이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즉 무화과나무저주-성전청결사건-무화과나무를 통한 기도에 대한 말씀의 순인데, 따라서 이것은 성전청결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성전청결사건에서
예수님은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에서 “기도”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놀라서 예수님께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을 하십니다. 즉 앞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냥 하는 말”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들과 듣는 말들은 그렇지 않음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과 듣는 말은 “그냥 하는 말과 그냥 듣는
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태도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예수님이 외치신 말씀인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와도 관련이 됩니다.
“내 집은 만만의 기도하는 집이다”는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의 인용입니다. 이 구절의 문맥은 “여호와의 구원이 가까웠고 여호와의 공의가 나타날
것”(56:1)을 선포하면서, 먼저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56:2). 56장 3절부터는 1,2절의 말씀을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 여호와께 연합한 고자”에게 직접 적용합니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3-7)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고 선포하셨으나,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냥 흘려 듣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은
세 구역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인의 뜰입니다. 성경에서 “성전”을 의미하는 곳은 실제적으로는 이스라엘인의 뜰과 지성소입니다. 즉
앞서 성전에서 환전하고 매매하는 것은 모두 이방인의 뜰에서 진행되던 일입니다. 달리 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믿지 않고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들을 결코 “성전”안으로 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들은 그저 “돈벌이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멀리서 오느라 제물로
드릴 짐승을 가져오지도 못했고 성전세로 드려야하는 “세겔”도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던 화폐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와서 환전하고 사야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땅의 가난한 이스라엘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즉
당시의 사람들은 “내 집은 만민-모든 민족들-이 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서 때가 아님에도 잎사귀는 무성하여 마치 열매가 많은 것처럼 속이고 있는 무화과와
같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집은 만민-모든 민족들-이 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될 것입니다.” (요점은 이 선언은 “기도가 아니다”는 점입니다. 앞서 예수님도 무화과나무와 관련해서 기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번역된 표현은 조금 의미심장합니다. 헬라어는 Ἔχετε πίστιν θεοῦ, 인데,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라“입니다.
„하나님의“라는 속격은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기에,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을“로 번역하거나 „하나님을
믿으라“로 의역을 합니다. 그런데 이 어구에서는 „가져라“는 동사명령 때문에, „하나님의
믿음을“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Habt Glauben an
Gott / Habt Gottes Glauben.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라“는 것이 나은 번역입니다. 이것을 문맥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라 누구든지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라는 예/비유는 하나님의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은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이 이루어질 줄 믿으시고 의심하지 않으시고 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다음으로 24절에서 예수님은 이제 이것을 „제자들“과
„기도“에 적용합니다: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즉 제자들은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달리 말하면, 제자들 자신이 „스스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너희에게 그대로 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즉 제자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그 기도를
제자들에게 그대로 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스스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믿음 혹은 그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그대로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빌리면,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것,” 혹은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에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흔히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에 대한 기도와 간구”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이사야서의 인용을 빌리면, 이 문맥에서 말하는 기도와 간구의 내용은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키며 여호와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여호와의 언약을 굳게 잡는
것,” 혹은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여호와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것”과 그 결과로
“여호와의 성 안에서 기념물과 이름을 받고 영원한 이름을 받아 끊어지지 않는 것”과 “여호와의 성산으로 인도되어 기도하는 여호와의 집에서 기뻐하며
여호와께서 예배를 기꺼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24절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24절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기도하고 구한 모든 것은 받을 것이라고 믿으라”입니다. “모든 것을 기도하고 구하라”와 “기도하고 구한 모든 것”의
차이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
“기도하고 구한 모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성전에 “서서 무엇을 기도합니까?”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25절). 조금 이상한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아무에 대한 혐의”를 말하고 뒤에서는 ‘너희 허물”을 말합니다. 25절 상반적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다면”는 표현은 “만약 네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용서하라”는 말은 “보내다, 면제하다, 버리다, 포기하다, 허락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어떤
것”(악한 마음이든, 잘못된 생각이든, 의심이든, 자만심이든..)을
포기하라, 내버리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내가 성전에 서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것(악한
생각, 의심 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포기하고
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왜 버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25절
하반절이 답합니다: “그리하여야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기”때문입니다. 25절 하반절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에서 이 단어는 “용서하다”는 의미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허물”이란 구체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누가복음 18장 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을 말씀합니다. 이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마치 마가복음에서 “서서 기도할 때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이라는
말씀에 해당합니다. 서서 기도하는 이 바리새인은 세리에 대하여 “무엇”(죄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바리새인은 자기자신에 대하여 “무엇”(자만심, 의롭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면서도 그런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이 바리새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은 몇 가지 적용점을 가집니다. 첫째,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서 기도하고 구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따라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셋째, 본문의 문맥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내 집은 만민-모든 민족-이 기도하는 집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집에서 거하게 하신 것에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그의 언약을 굳게 지키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기쁘게 기도하여 예배할 것이며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내려놓으실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먼저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내려놓기를 기도하고 그것을 도와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허물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마가복음 #큐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장로교회 #고신 #Frankf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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