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외모가 그럴 듯 하지 않았던 엘리사는 벧엘에서 의심을 받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도 대머리라는 이유로 조롱합니다(왜냐하면 나실인은 머리가 길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단지 엘리사의 외모로 엘리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조롱하는 자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이 엘리사와 함께 하심을 확인시켜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판단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며, 나아가 세상의 조롱과 비웃을이 있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어제 본문에서 여리고의 선지자들의 제자들(아들들)이 외적으로는 엘리사를 환영하는 듯 하였으나 그 마음으로는
엘리사에게 불순종하며 그 권위에 도전하여 결국 실패하고 엘리사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여리고의 사람들은 여리고의 선지자들이나 그 제자들이 아닌 엘리사에게 여리고성의 물이 나쁜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요청합니다.
여리고 사람들의 요청에 대해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라”는 우리가 보기에 다소 엉뚱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고대에 소금은 물을 깨끗하게 하거나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한 비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여리고 사람들과 선지자들은 이전에도 소금을 사용하여 좋은 물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을 것이지만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즉시” 소금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엘리사 선지자가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엘리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여리고의 선지자들의
제자들(자녀들)의 모습과는 대조됩니다. 이제 엘리사는 소금을 들고 물 근원에 던집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소금이 물을 좋은 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심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21). 이를 통해 엘리사는
엘리사 자신이나 소금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로 사람들의 마음을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엘리사와 관련된 또 다른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가는 중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조롱하자, 엘리사가 그들을 저주하였고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 4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죽인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읽게 되면 몇 가지 의문들과 함께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단순히 우연적인 사건이나, 혹은 엘리사의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넓은 문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그리고 이에 대한 언약적 저주와 실행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통해 벧엘의 사람들과 나아가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본문입니다.
먼저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이것이 언약적 저주임을 드러냅니다. 언약적
저주의 내용 중에 특별히 관련된 것은 래위기 26장 22절(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의 자녀를 움키고 너희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이리니 너희의
길들이 황폐하리라; 겔5:17;암5:18-19)입니다. 엘리사가 자신을 조롱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언약적
저주를 내리는 이유는 단지 그 아이들이 “자신을 조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사가 여호와의 선지자됨을 그들이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대머리인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유전적인 것이든 혹은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은 것이든(렘16:6; 겔7:18; 암8:10; 미1:16 등),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하여 슬퍼할 것을 보여주는
예언적 행동이든지 간에, 벧엘의 아이들은 엘리사의 여호와의 선지자됨을 조롱하는 것으로 이것은 곧 엘리사를
통해 전해지는 여호와의 말씀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벧엘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사실상 벧엘의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열왕기상 12장에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에 두고 섬기며 일반 백성들인 벧엘의 사람들로 그 제사장을 삼습니다. 열왕기상 13장 1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러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 여로보암을 보고, 그 제단에 대하여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를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그 증거로 제단이 갈라져 재가 쏟아질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0장29절에서
예후가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언급을 볼 때, 벧엘의
사람들은 열왕기상 13장에서 있었던 경고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결국 열왕기상 13장의 언약의 저주는 열왕기하 23장에서 요시야에 의해 실행됩니다.
이러한 열왕기상하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열왕기하 2장의 시점에서도 벧엘의 사람들은
여전히 황금송아지를 섬기며 그를 통해 여러 가지 유익을 얻으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상황은 엘리야가 사라지고 대머리인 볼품없어 보이는 엘리사, 아직까지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선지자, 겨우 자기 스승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는 일이나 하던 엘리사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벧엘의 사람들은 그 아이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여호와의 선지자를 조롱하여
앞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선언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경고와 심판의 선언을 조롱합니다. 특히 아이들이
벧엘을 지나가는 엘리사를 보고 성읍에서 밖으로 나와 엘리사의 뒤를 따르며 조롱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아이들의 행동은 어른들의 묵인 내지는 부추김에 의한 의도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엘리사는 개인적인 모욕감이나 우발적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벧엘의 사람들에게 경고로
언약의 저주를 선언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언약의 저주를 인정하시어 심지어 즉각적으로
그 저주를 실행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하 2장의 문맥에서
앞서 언급된 여리고 사람들의 모습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과 뚜렷하게 대조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인정과 그에 대한 온전한 순종만이 언약적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2:21). 뿐만 아니라 열왕기상 13장의 언약의 저주가 열왕기하 23장에서 성취되는 그 중간 지점으로써
열왕기하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벧엘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판단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며, 나아가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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