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
하였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는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하였지만, 사환인 게하시는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을 따라서 나아만을 찾아가 스승인 엘리사의 이름을 빌려 예물을 요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게하시는 이에 대하여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하여 속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게하시의 모습은 하나님과 엘리사를 거짓말로 속일 수 있다는 불신자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 결과 게하시 자손뿐만 아니라 그 자손에게까지 나병이 있게 됩니다. 혹시라도
우리들에게 이러한 어리석은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에게 집중됩니다. 나아만이 깨끗함을 받은 후 드린 예물을 엘리사는 다 거절하고 받지 않습니다.
그러자 사환인 게하시는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마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받지 아니하였도다.” 한편으로 사환인 게하시의 이러한 불만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4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선지자의 제자들이 굶주리고 빈궁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엘리사의 사환으로써 함께 여호와를 섬기며 엘리사의 제자로 서로 친근한 사람들의 형편을 생각하면 나아만의 손에서 상당한 양의 예물을 받아 제자들의
굶주림을 어느 정도라도 해결해 주어야 마땅한 듯 합니다. 실제로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에브라임으로부터 선지자의 제자 두 사람이 찾아왔다”(22)는 것을
핑계로 말하면서 재물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게하시가 이러한 속마음을 가진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왜냐하면 게하시는 “내가 무엇이든지 받으리라”고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즉 게하시는 여러 가지 사정상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습과 습관대로 선지자로부터 도움을 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물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궁핍한 북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도 예물을 받는데, 이
아람 사람에게는 그러한 예물을 면제하여 주다니! 이런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게하시의 불만가득한 속마음은 이어지는 두 번의 거짓말과 한번의 행동 속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나아만을 쫓아간 게하시는 거짓말로 선지자의 제자들을 핑계로
댑니다: “에브라임 산지로부터 두 제자가 왔으니….” 더구나
이 요구를 자신의 “주인”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나아만에게
전달합니다. 이어서 나아만이 준 예물을 집가까운 언덕에 이르러서서는 직접 집으로 가져가서 “감추고” 나아만의 사환들은 “돌려보내고” 그후 집에 “들어가” 그의
주인 엘리사 앞에 “섭니다.” 이렇게 게하시는 주의깊고 계획적으로
자신의 주인 엘리사가 모르도록 행합니다. 나아가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질문하자, 게하시는 “아무데로 가지 아니하였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러한 게하시의 모습은 “거짓말-숨김-거짓말”로 요약됩니다.
이러한 게하시의 거짓말과 행동 속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한 가지 단어는 새 번에 걸친 “주인”과 “사환/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사환,내 주인”(20), “우리
주인”(22), “그의 주인, 당신의 종”(25). 즉 게하시는 엘리사가 자신의 “주인”이며 자신은 그의 사환/종 임을 분명히 알고 나아가 주인의 생각과
뜻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정작 주인의 말과 행함에 불만을 가득하게 품고 주인의 말과 행동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따라서 행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관철하는 방법은 “거짓말과 숨김”입니다. 이것은
특히 자신의 주인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20)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를 거짓말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러한 게하시의 거짓말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나아가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상황에 맞지 않는 그 탐욕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게하시의 모습과 심판은 이스라엘의 모습과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아래 참고) 결과적으로 게하시는
나아만의 나병에 걸리고 그 자손들까지도 그 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게하시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들에게는 없는지 되돌아보며,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참고 게하시와 북이스라엘의 오버랩핑
이러한 책망과 경고는 게하시를 향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즉이러한 게하시의
모습은 단지 개인의 모습을 넘어서 당시 북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다윗 때에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 국력이 강성하여 아람을 비롯한 주변의 민족들은 다윗과 이스라엘에 복속되어 예물과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상황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약해진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조공과 예물을 바쳐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죽이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6:31-33).
그렇기 때문에 마치 게하시와 그 자손에게 나병이라는 심판이 선언되고 임한 것처럼,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이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선언되고 성취됩니다(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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