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비록 요나가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신지 알았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그러한 은혜와 뜻이 자신이 싫어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화를 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지 돌아보며,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어제 본문에서 요나가 단 하룻동안 다니면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에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고, 이것을 보시고 확인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요나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요나의 첫 반응은 세 가지 동사로 드러납니다: 싫어하고 심히 불쾌하고
화를 내었다. 생각해 보면,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감정적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요나가 보여주는 반응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2장에서 요나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2:9)라고 고백하였지만, 3장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3:10)는
것 때문에, 싫어하고 불쾌해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불평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이러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4:2).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재앙을 전제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죄악 – 진노와 선포 - 재앙
– 회개 – 구원과 회복”이라는
도식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차례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조차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이 재앙을 당하기도 전에,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만으로도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이방사람들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마음을 돌리셨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참된 뜻이 단지 재앙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하고 회복시키셔서 재앙없이 구원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요나는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꼈을 듯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조차도 경험하지 못한 은혜를 그들에게 주다니…
그렇기에 다시 한번 요나는 자신의 목숨을 내버려고자 합니다.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이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보에 자신이 더 이상 동참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2:9)라고까지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자 하며, 자신의 생각에 좋은 것만 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요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너의 화내는 것이 옳으냐
라고 반문하시며 요나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십니다. 우리 말 번역은 이것을 “옳고 그름”(right and wrong)의 문제로 오해되도록 “옳으냐”라고 번역하였으나, 이
단어는 “야타브”라는 단어로 “좋게 만들다” “올바르게 사용하다”
“유익을 끼치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런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이 좋으냐 / 더 나으냐(good/better)에
대한 질문입니다. 문맥에서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반문에 대하여 답하지 않고 침묵합니다.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에게 대하여 가지는 감정적인 분노와 배신감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이제 요나는 아무 말없이 성밖으로 나가,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니느웨성읍에 일어나는 일을 목격하고자 그늘에 앉아 지켜봅니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끼고 이글거리는 분노의 눈으로 니느웨성을 쏘아보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입술로는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였으나, 정작 그 고백을 진실된 마음과 감정으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며
보여주셨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는 기도의 내용을 진실되게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써, 주님의 모습을 닮기를 소망하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한지 돌아보며,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참고
3장과 4장은 시간적인 순서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요나가 심판을 선언하고 나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3:1-9) 요나는 그러한 니느웨를 떠나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중에(4:5)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셔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고(3:10)
박넝쿨과 벌레를 통해 요나를 일깨우시고(4:6-9) 요나는 하나님께 화를 내고(4:1-4) 요나에게 마지막으로 교훈하십니다(4:10-11).
#요나_4:1-5, #만나교회,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장로교, #고신,
#Frankfurt, #Korean_Church, #koreanische_kirchengemeinde, #MannaChur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