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박넝쿨, 벌레, 뜨거운 동품과 해를 통해서 요나를 가르치시며 요나가 수고도 아니하고 재배도 아니하고 하룻밤만에 말라버린 박넝쿨을
아꼈듯, 하나님께서도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시는 것이 당연함을 알려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일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들을 가르치십니다. 매일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아끼시는 분이심을 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싫어하고 화내면서 분노한 요나의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러한 요나에게 네게
화내는 것이 좋으냐 라고 반문하시지만, 요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반문을 무시(?)하고 오히려 초막을 짓고 니느웨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분노에 가득하여 노려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요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예비하셔서(cf. 1:17) 초막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요나를 괴로움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그 박넝쿨 때문에 크게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요나 스스로 자신을 위하여 초막을 지어 그늘을 만들어 앉았으나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5). 요나의 이러한 모습은 4장 1절에서 니느웨를 바라보며 매우 싫어하고 불쾌하게 여기며 화를 낸 것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러한 기쁨은 채 하루가 되기 전에 또다시
분노로 변합니다(4: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예비하사(cf.
1:17; 4:6) 이튿날 새벽에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품을 예비하셨고(cf.
1:17l 4:6, 7) 해가 요나의 머리에 뜨겁게 내리 쬐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이런
상황에서 약해지고 요나는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하나님께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요나의 모습과 말은 4장 3-4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요나는 니느웨에 아무런 재앙이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며 화를 내며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요나에게
“네가 화를 내는 것이 더 나으냐”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반문에는 응답하지 않고 침묵하였으나, 이제
하루의 그늘을 누린 후, 다음날 그러한 뜨거운 햇살을 가려줄 박넝쿨이 없어지고 뜨거운 햇살을 받게 되자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응답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이번에도 요나에게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화를 내는
것이 좋은 것이냐/더 나으냐 라고 반문하시는데 요나는 이번에는 내가 화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더 낫다/ 좋다 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니느웨가
구원받은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과 박넝쿨이 죽은 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각각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것이
좋은 것이냐”라고 반문하지만, 요나는 니느웨와 관련해서는
침묵하지만, 박넝쿨과 관련해서는 좋다고 응답합니다. 즉 요나는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박넝쿨은 아끼고 그것이 말라 죽자 화를 지만, 그 반대로 니느웨는
자신과 이스라엘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만들었기 때문에, 니느웨는 아끼지 않고 그것이 말라 죽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달리 말하면,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의
기준은 자기자신의 생각과 유익입니다. 비록 구원이 여호와께 속하였지만,
결국 요나는 여호와가 아닌 자기자신의 생각과 유익을 기준을 삼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4장
10-11절에서 요나를 책망하시면서, 요나가 박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당연함을 지적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이 기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요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구원의 기준이십니다. 나아가 이러한 구원의 기준인 하나님의 뜻은 회개하는 죄인을 아끼시며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통해, 참으로 구원의 기준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결정임을 기억하며, 나아가 회개하는 죄인을 아끼며 용서하며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구원의 기준임을 인정하며 회개하는 죄인을 아끼시는 하나님을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며 알아가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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